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는 1908년에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국책회사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진행하던 토지조사사업과 맞물려, 1910년부터 1926년까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국유지가 된 농토를 일본 본토인들에게 농업이민식으로 불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고, 이후에는 부동산 담보대부, 30년대 이후에는 공업건설부분에 대한 투자를 주로 진행한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직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지난 겨울의 남도여행기 2부가 지체되고있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과 인천항 조계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가 부족해서인데, 얼마 전 대전에 갔다가 겨울 여행 이후 찾아다니고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각 지점 중 대전지점에 다녀올 수 있었다.
전국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은 여러군데에 있었지만, 현재 남아서 보존되어있는 건물은 부산지점, 목포지점, 그리고 대전지점 뿐이다.
부산지점은 해방 후 미 문화원이 되었다가 한국전쟁 기간중엔 미 대사관으로 썼다가 다시 문화원으로 쓰다가 반환되어서 지금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쓰고있다고 한다. 목포지점은 나중에 여행기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해군 목포해역방어사령부 예하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다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사진전시물의 상당수가 18금 하드고어(-_-)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사진은 전시관 내에 하나로 족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대전지점은 동구 인동 74-1번지로 1921년에 강경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건축되었으며 붉은 벽돌조 2층건물로 현재는 원형이 상당히 많이 망가져 있는데다가 내부도 거의 개축되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내가 갔을때는 주인아저씨가 퇴근한 뒤여서 내부를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2층 출입구가 다른건물을 통해서 연결되어있는것으로 보아 내부 구조 자체도 상당히 개조되어있는듯 했다. 예전에 체신청, 전신전화국을 거쳐 지금은 2층은 세무사 사무실로, 1층은 건물 내장재 가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 98호.
사실 대전에서 근대건축물 중 보존이 잘 되어있는 건물은 현재 충남도청으로 쓰고있는 건물로, 업무시간에 찾아가면 별 제재없이 출입할 수 있다.
대전지역은 근대건축물 자체가 그다지 드물지 않은 곳이지만, 지하철 공사 진입로 건축 문제로, 문화재 등록예정이던 53년 건축 구 한국은행 대전지점 철거사건 등 근대건축물이 그다지 관심받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경부선 철도를 따라 인동->대전역까지 이동하다 보면 정말 신기하게 개축된 근대건축물들을 상당수 볼수 있으니 분야에 관심이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탁통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43년 3월 24일 워싱턴 회담에서 였다. 루즈벨트는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에게 전후 신탁통치가 필요한 국가로 한국과 인도차이나를 지목했고,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회담에서 미, 영, 중 3국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선언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러한 '적절한 시기'는 루즈벨트의 다자간 국제 신탁통치를 의미했으며 당시 미주에 거주하고 있던 이승만과 재미한인들은 즉시 독립과 상치되는 이러한 선언에 반대했으며 중경의 임시정부 인원들 역시 신탁통치를 국제공관론, 국제공영론이라 부르며 격렬히 반대했다.
이후 유럽전선이 정리되고 소련의 대일참전이 임박하자 소련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일 연합전선에 합의하고 1945년 2월 8일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비공식 회담에서 "한국은 20년 내지 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은 미국이 한국 문제를 통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군정설치, 신탁통치, UN의 이용방안을 제시한다. 소련은 당시 한반도 내부의 좌익세력의 우세에 주목하여 한반도의 즉시 독립 혹은 한국인들의 참여가 보장된 다자간 후견제를 중시했으며, 한반도에 수립될 정부가 친소적인 성격을 지니도록 하고, 일종의 안전핀으로 한반도의 상당지역까지 소련군이 점령하는 방안을 고려하고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임시정부에는 여당격인 한국독립당과 제1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 그리고 소수파로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신한민주당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한독당과 민혁당간의 파벌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드며 44년에는 민혁당이 임정청사를 점거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의 국회의장석 점거에 비해 스케일이 큰 편이다.)
그러나 선발대 격으로 먼저 입국한 김 구와 한독당측도 이승만에 비해서는 귀국이 늦은 편이었고, 귀국 후 임시정부의 요인들 역시 상황과 이념에 따라 뿔뿔이 핱어지게 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 대다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갖지 못하고 관망상태에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사상 탄압과 보도통제로 인하여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사들 까지도 정세의 변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정치활동을 전개한 주요 세력으로는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 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정치세력 상호간에 국가건설의 기본방침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이들 중에서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조직화 된 것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呂運亨은 1944년 8월에 조동우趙東祐 등과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는데, 뒤에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이만규李萬珪, 이상백李相佰 등이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상당수의 조직원을 갖고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참패와 원폭투하로 패전이 임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이 통치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총독부는 당시 조선의 청년·학생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여운형에게 이를 다시 요청한다.
8월 15일 아침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蕂柳作)으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위촉받은 여운형은 17일에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완료하고 8월 26일에는 건국선언과 강령을 발표한다. 그러나 내부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차이에 따라 이합집산이 거듭되면서 세력들은 점차 분열하여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점차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된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포고 이후 네 방면으로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중 제1극동방면군 예하 소련 제 25군이 한국 점령임무를 담당했다,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상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웅기, 나진, 청진 등 주요 항구 점령을 목표로 싸웠으니 일본군이 항복하던 8월 15일 청진에서 전투중이었고, 일본 항복 이후 16일에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22일 함흥에 진주하였고, 20일 원산에 상륙한 부대는 둘로 나뉘에 2개 연대는 평양으로, 1개 연대는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24일 공수부대가 평양에 들어갔고 25일 해주에 도착한 병력 중 일부가 사리원을 거쳐 개성까지 진출한다. 각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와 군대해산, 군사시설 해체임무를 수행했으며 소련군 사령부는 8월 27일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운행을 중지시키고 38선 인접지역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북교류를 통제했다.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는 29일 치스차코프에게 연합국 합의인 38도선을 따라 병력배치를 명령했고 25군 휘하 88군단은 9월 3일, 10군단은 9월 10~12일 사이에 38선에 도착한다.
한편 미 태평양육군사령부의 대일 점령계획인 블랙리스트(Blacklist)최종판에 따르면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미 24군단을 포함한 미 제 10군이 한반도 점령군으로 배치되었다. 이 중 한반도 배치계획은 베이커-40(Baker-Forty)로 지칭되었으나, 8월 12일 미 24군단의 독자적인 한반도 점령이 결정되면서 하지 중장(John R. Hodge)이 이끄는 미 24군단은 9월 6일 제물포를 통해 한반도에 진주했다. 이어 베이커-40계획에 의거 9월 8일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과 서울 일대를 점령하고 9월 11일 소련군과 개성에서 조우한다.
9월 초 미군의 진주가 임박하자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9월 6일 여운형을 임시 의장으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조직법을 가결,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주석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은 참여를 거부하고 아놀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과 하지(John R. Hodge) 미군사령관은 10월 10일과 1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해방직후 독립국가 건설은 좌절되게 된다.
한편 이 시기까지 연합국이 합의 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것과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 뿐 이었고, 이 내용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외상이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위해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참여하에 미소영중 4개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협정을 미, 소가 체결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임정세력은 1946년 1월 4일 김구 주석의 성명을 통해 비상대책을 천명하고 1월 21부터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고 우익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이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가세하고 2월 1일과 2일 서울 천주교회에서 모든 우익정당, 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 비상국민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28명이 참여한다.
1946년 1월 9일 조선공산당등 좌익진영 29개 단체가 서울 YMCA강당에 모여 민주주의 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 일체의 준비공작을 공산당과 인민당에 일임하고 2월 15일과 16일에 좌익의 통일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를 개최한다. 좌익세력은 1946년 1월 2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돌연 찬탁 입장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인 박헌영은 평양에 송환되어 소련 측으로부터 신탁지지 지령을 받고 서울에 귀환, 찬탁 노선을 결정하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3월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47년 7월까지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하게 되고 47년 7월 19일 좌익세력의 여운형은 우익세력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어지기도 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하게 되자 9월 17일 미국무장관 마샬(George C. Marshall)은 한국문제를 UN에서 안건으로 제출하여 11월 14일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을 43:0(기권5)으로 가결하였고, 18일~19일 북에서는 북조선 인민회의가 열려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8년 1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일행이 한국에 입국하고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소련은 1월 22일 유엔 소련대표를 통해 협조거부의사를 밝힌다, 김구는 1월 28일 위원단과의 면담 이후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지만 북측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월 26일 열린 UN소총회에서 미국이 제출한 남한총선거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하고 3월 1일 주한미육군사령관 하지는 5월 10일 총선거를 발표한다. 한편, UN소총회의, 결정에 실망한 김구 등은 3월 11일 김구,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조소앙趙素昻, 조성환曺成煥, 조완구曺琬九, 홍명희洪命憙 의 7거두성명을 발표, 남의 총선거와 북의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을 강경히 반대한다.
3월 25일 평양방송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가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 것을 결의한 내용을 보도하고 3월 27일 김규식에게 서한이 전달된다. 이에 김 구등은 19일에서 21에 걸쳐 북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 김규식은 5월 6일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지만 이미 5월 10일 결정된 남한 단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편, 꾸준히 남한단선을 주장했던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파세력은 선거에 대비한 조직적 준비를 진행시켰고, 단선정부 수용을 반대했던 김규식 및 김구가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5월 10일 추정 등록률 79.7%, 등록자대비 투표율71.6%로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6월 25일 선거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5월 31일 국회가 개원되어 제헌작업에 착수, 7월 17일 헌법을 공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 선포된다. 이미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통과시킨 북한은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명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을 선언한다.
1948년 12월 12일 UN총회는 대한민국의 법적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정통성과 국제적 지지를 부여하는 미국측 결의안을 채택한다.
UN결의안 중 2조는 다음과 같다.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하였으며 또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지역에 대해 실효적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가 수립되었다는것과, 동 정부는 한국의 동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자 임시위원단에 의해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또한 동 정부가 한국내의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
한국사-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2006년.
현재까지 확인된 임시정부는 국내외로 8개에 이른다. 4월 9일 서울에서 '조선국민대회, 조선자주당연합회'명의의 문건으로 알려진 '조선민국 임시정부', 4월 17일 철산, 선천, 의주 지방에서 '조선독립단'명의의 문건이 배포됨으로서 알려진 '신한민국 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명의의 문건 배포를 통해 알려진 '한성정부', 4월 1일 천도교계가 중심이 되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수립하려 했다는 '대한민간정부',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수립이 선포된 '대한국민의회', 4월 13일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수립이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4월 15일 <길림공화보>에 수립이 게제된 '고려임시정부',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고,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한 임시정부등이다. 당시의 분산된 독립운동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임시정부의 통합은 1919년 9월에 이루어지게 되고 통합의 주체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와 4월 11일 조직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3.1운동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노력으로 4월 2일 13도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어 한성정부가 조직되게 된다. 실제로 13도 대표가 모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서울의 천도교 대표, 기독교 대표, 유림 대표, 이외에 인근지역의 인원들이 모인것으로 보인다. 4월 23일에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임시정부 선포문 등이 배포되어 한성정부의 존재가 알려진다. 다만 임시정부 선포문은 의주,선천 지방의 신한민국 정부와 관련있는 문서로 밝혀졌다. 신한민국의 일부 인원들은 한성정부 세력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나 결국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상해는 윌슨의 14개조 강화조건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선언, 보헤미아, 헝가리의 독립선언, 필리핀의 독립운동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가가 상해로 몰려들게 된다. 상해는 프랑스조계로 일본의 경찰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며 세계적인 무역항이었기 떄문이다. 당시 상해에는 2.8 독립운동의 주역인 이광수, 3.1운동세력이 파견한 현순, 노령에서 온 여운형등과 신한청년당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3월 하순경 보창로 329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다. 이 이후에 노령과 만주, 북격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도착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다. 독립임시사무소에서는 이봉수를 국내로 파견 33인 민족대표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였지만, 3월 26일, 27일간에 상해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8인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석우, 이광수, 현순 등 노령과 만주,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되어있었으며 이후 29명의 임시의정원 위원이 이봉수가 도착하기 전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한다. 9일~10일간의 회의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정부조직과 인선을 마치고 임시헌장의 제정,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한다. 이런 인선과정에서도 한성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의 각원명단이 참고가 되어 한성정부의 각원인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상해임정의 각원으로 선임되게 된다.
한편 노령에서는 20만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9년 2월 25일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된다. 이들은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 그 성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공표되자 대한 국민의회에서는 4월 15일 교섭을 위해 원세훈을 특사로 파견한다. 5월 25일 미국에서 도착한 안창호등과 통합논의가 진행되게 되는데 안창호는 실질적으로 소련지역의 이동휘,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과 상해의 자신으로 집권 셋을 구성하려는 구상을 보인다.
안창호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해 임정과 대한국민의회를 해산하고 한성정부로의 통일을 골자로 하는 통일안을 노령에 전달하고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는 대한국민회의 의원총회가 개최되었고 안창호가 전달한 통일안의 협의되어 그날부로 해산을 선포한다.
한편 상해의 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안창호는 정부개조안과 임시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는데 이는 한성정부의 한성정부를 표준으로 상해임정을 개편하는 것인데 실제로 인원상의 변동은 없이 직함등만 차이가 있는 것이라. 1919년 9월 7일 임시의정원은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개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한성정부 임원이면서 상해임정의 국무총리지만 이미 미주에서 대통령을 자처하고 활동하고 있는 이승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국무원을 한성정부의 각원 선정과 같도록 인선하는 정부개조안을 승인하고 9월 11일 의정원은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공포하고 국무원으로 국무총리 이동휘를 필두로 하는 내각을 임명한다.
그런데 이런 개조안은 대한국민의회의와의 통합안의 내용인 한성정부의 승인과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 양자의 해산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한성정부의 승인은 '정신적'인 승인일 뿐이고 실제로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상해 임정을 한성정부와 동일하게 개조하는 것이라는 변명섞인 발표를 독립신문에 개제한다. 이런상황에서 9월 18일 이동휘를 비롯한 노령의 인사들이 상해에 도착하고 이들은 이러한 개조조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통합 임정의 내각취임을 거부한다. 또한 위임통치 청원의 장본인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한것에 대해 우리민족은 절대독립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동휘가 내각 취임을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국민의회의 귀화한인세력의 대표인 문창범은 교통총장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고, 한인사회당 세력을 주도하던 이동휘는 11월 3일 임정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떄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 도폐渡弊 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凋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盛衰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을 삼는다. 물론 1~2명의 상급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리는 없다. 따라서 금회今回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은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覺醒을 촉구促求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들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此際에 <조선>이라고 하는 관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은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결코 도이徒爾가 반드시 아님을 믿는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헌병대 조사 중에서.
일본군은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으로 상해를 점령하고 이 해의 천장절天長節(천왕탄생경축일; 4월 29일)행사를 상해점령전승기념식을 겸해서 외국인 공동조계인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하며, 경축식과 동시에 관병식이 있으니 일본거류민들은 일장기와 수통을 들고 참석하라는 보도를 상해에서 발행하는 일본신문에 게재하였다.
당시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위치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일본군의 위협과 만보산 사건으로 조성된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의 타결을 위해 김구를 대장으로 하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이름을 "한인애국단"이라 정하고 이미 이봉창의 의거를 시도한 바가 있었고, 상해 주둔 일본군총사령부가 한곳에 모이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관병식이 마무리 되고 11시 40분경 개회사와 축사 이후에 기미가요 제창때에 투척된 수통형 폭탄은 시라카와 이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앞 단상에서 폭발했다.
이 의거로 인해 상해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이시노리 대장은 중상을 입고 입원 후 사망,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중상을 입는다. 일본해군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은 우측 실명 등 중상을, 주중국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는 우측 다리 절단 등 중상을, 상해 거류민단장은 사망. 상해 총영사도 중상을 입는다.
의거 직후 체포된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일본 상해파견군 군법재판에서 사형 언도 후 11월 18일 오사카 형무소 이감, 12월 18일 카나자와(金澤) 육군 교도소 이감,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에 카나자와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된다. 당시 나이 25세였다.
이 거사로 인해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한국인과 중국인간의 연대를 회복시킬 수 있었고, 중국영토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여건을 조성했다.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이후 약화된 임시정부의 위상과 당시 국내외에서 침체되어있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1) 만보산 사건 : 만주 길림성 만보산萬寶山 삼성보三成堡에서 수전 개간중이던 한국소작민들의 수로공사에 주변 농지가 피해를 입자 인근 중국인들이 1931년 7월 1일~2일에 공사장에 난입하여 수로공사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관동군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을 증파해서 수로공사를 강행하는 한편 한국 국내신문 장춘지국에 근무하는 중국인 장소봉張小峰에게 중국인들의 습격을 받아 만보산에서 한국인들이 다수 살해되었다는 허위보도를 내게 했고, 이에 격양된 한국인들은 7월 3일부터 9일까지 인천, 서울, 신의주, 평양 등지에서 중국인 109명을 살해하고 160명을 부상케 했다. 이 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6000여명의 화교들이 중국으로 귀국했고 만주에서는 이에대한 보복으로 한국인들을 습격하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보산 사건 이후로 만주와 관내 등 중국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주2) 만주사변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 봉천 북쪽 교외의 류조구柳條溝 부근의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취급 만주를 침략하여 4개월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노선을 점령한다. 이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수립하고 전 청나라 황제 부의簿儀를 집정으로 취임시킨다.
주3)상해사변 : 1932년 1월 18일 일본군은 중국인 불량배를 매수하여 일본승려와 신자 2명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한명이 1월 24일 사망하자, 1월 27일에 24시간의 시한부로 상해시장의 사과, 가해자의 처벌, 피해자의 배상, 배일운동의 단속을 요구한다. 중국측이 28일 오후 3시 일본측의 요구에 대한 수락의 뜻을 통보하지만 일본은 1월 28일 밤 11시 10분경 군사작전을 개시한다. 중국측에서는 채연해蔡延楷가 지휘하는 제19로군이 시가전을 벌이면서 방어하였고 1월 29일 국민당정부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과 동시에 장개석 예하의 장치중張治中이 지휘하는 제5로군(제87사단과 제88사단)을 상해에 투입하고 일부 민병대도 방어전에 참가한다. 일본군은 중국군과 맞서 본국에서 해군과 육군을 증파하여 병력 10만과 항공기 100여대를 투입하여 상해를 점령하게 된다.
참고자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논문집. 한국 근현대사학회 편. 국가보훈처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