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reamed Realms Tatter Base


현재까지 확인된 임시정부는 국내외로 8개에 이른다. 4월 9일 서울에서 '조선국민대회, 조선자주당연합회'명의의 문건으로 알려진 '조선민국 임시정부', 4월 17일 철산, 선천, 의주 지방에서 '조선독립단'명의의 문건이 배포됨으로서 알려진 '신한민국 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명의의 문건 배포를 통해 알려진 '한성정부', 4월 1일 천도교계가 중심이 되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수립하려 했다는 '대한민간정부',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수립이 선포된 '대한국민의회', 4월 13일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수립이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4월 15일 <길림공화보>에 수립이 게제된 '고려임시정부',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고, 박영효를 부통령으로 한 임시정부등이다. 당시의 분산된 독립운동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임시정부의 통합은 1919년 9월에 이루어지게 되고 통합의 주체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와 4월 11일 조직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3.1운동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노력으로 4월 2일 13도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어 한성정부가 조직되게 된다. 실제로 13도 대표가 모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서울의 천도교 대표, 기독교 대표, 유림 대표, 이외에 인근지역의 인원들이 모인것으로 보인다. 4월 23일에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임시정부 선포문 등이 배포되어 한성정부의 존재가 알려진다. 다만 임시정부 선포문은 의주,선천 지방의 신한민국 정부와 관련있는 문서로 밝혀졌다. 신한민국의 일부 인원들은 한성정부 세력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나 결국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상해는 윌슨의 14개조 강화조건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선언, 보헤미아, 헝가리의 독립선언, 필리핀의 독립운동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가가 상해로 몰려들게 된다. 상해는 프랑스조계로 일본의 경찰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며 세계적인 무역항이었기 떄문이다. 당시 상해에는 2.8 독립운동의 주역인 이광수, 3.1운동세력이 파견한 현순, 노령에서 온 여운형등과 신한청년당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3월 하순경 보창로 329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다.  이 이후에 노령과 만주, 북격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도착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다. 독립임시사무소에서는 이봉수를 국내로 파견 33인 민족대표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였지만, 3월 26일, 27일간에 상해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8인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석우, 이광수, 현순 등 노령과 만주,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되어있었으며 이후 29명의 임시의정원 위원이 이봉수가 도착하기 전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한다. 9일~10일간의 회의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정부조직과 인선을 마치고 임시헌장의 제정,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한다. 이런 인선과정에서도 한성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의 각원명단이 참고가 되어 한성정부의 각원인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상해임정의 각원으로 선임되게 된다.
한편 노령에서는 20만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9년 2월 25일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된다. 이들은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 그 성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공표되자 대한 국민의회에서는 4월 15일 교섭을 위해 원세훈을 특사로 파견한다. 5월 25일 미국에서 도착한 안창호등과 통합논의가 진행되게 되는데 안창호는 실질적으로 소련지역의 이동휘,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과 상해의 자신으로 집권 셋을 구성하려는 구상을 보인다.
안창호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상해 임정과 대한국민의회를 해산하고 한성정부로의 통일을 골자로 하는 통일안을 노령에 전달하고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는 대한국민회의 의원총회가 개최되었고 안창호가 전달한 통일안의 협의되어 그날부로 해산을 선포한다.
한편 상해의 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안창호는 정부개조안과 임시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는데 이는 한성정부의 한성정부를 표준으로 상해임정을 개편하는 것인데 실제로 인원상의 변동은 없이 직함등만 차이가 있는 것이라. 1919년 9월 7일 임시의정원은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개조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한성정부 임원이면서 상해임정의 국무총리지만 이미 미주에서 대통령을 자처하고 활동하고 있는 이승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국무원을 한성정부의 각원 선정과 같도록 인선하는 정부개조안을 승인하고 9월 11일 의정원은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공포하고 국무원으로 국무총리 이동휘를 필두로 하는 내각을 임명한다.
그런데 이런 개조안은 대한국민의회의와의 통합안의 내용인 한성정부의 승인과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 양자의 해산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한성정부의 승인은 '정신적'인 승인일 뿐이고 실제로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상해 임정을 한성정부와 동일하게 개조하는 것이라는 변명섞인 발표를 독립신문에 개제한다. 이런상황에서 9월 18일 이동휘를 비롯한 노령의 인사들이 상해에 도착하고 이들은 이러한 개조조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통합 임정의 내각취임을 거부한다. 또한 위임통치 청원의 장본인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한것에 대해 우리민족은 절대독립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동휘가 내각 취임을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대한국민의회의 귀화한인세력의 대표인 문창범은 교통총장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고, 한인사회당 세력을 주도하던 이동휘는 11월 3일 임정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estea

2006/11/19 06:21 2006/11/19 06:21

Trackback URL : http://www.isvast.net/estea/trackback/2256606

Leave a comment

Calendar

«   2009/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31145
Today:
16
Yesterday: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