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분단-광복부터 건국까지
- Posted at 2006/11/2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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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럽전선이 정리되고 소련의 대일참전이 임박하자 소련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일 연합전선에 합의하고 1945년 2월 8일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비공식 회담에서 "한국은 20년 내지 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은 미국이 한국 문제를 통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군정설치, 신탁통치, UN의 이용방안을 제시한다. 소련은 당시 한반도 내부의 좌익세력의 우세에 주목하여 한반도의 즉시 독립 혹은 한국인들의 참여가 보장된 다자간 후견제를 중시했으며, 한반도에 수립될 정부가 친소적인 성격을 지니도록 하고, 일종의 안전핀으로 한반도의 상당지역까지 소련군이 점령하는 방안을 고려하고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임시정부에는 여당격인 한국독립당과 제1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 그리고 소수파로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신한민주당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한독당과 민혁당간의 파벌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드며 44년에는 민혁당이 임정청사를 점거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의 국회의장석 점거에 비해 스케일이 큰 편이다.)
그러나 선발대 격으로 먼저 입국한 김 구와 한독당측도 이승만에 비해서는 귀국이 늦은 편이었고, 귀국 후 임시정부의 요인들 역시 상황과 이념에 따라 뿔뿔이 핱어지게 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시점 대다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갖지 못하고 관망상태에 있었다. 일제의 가혹한 사상 탄압과 보도통제로 인하여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사들 까지도 정세의 변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정치활동을 전개한 주요 세력으로는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 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정치세력 상호간에 국가건설의 기본방침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립하고 투쟁하였다. 이들 중에서 해방과 함께 가장 먼저 조직화 된 것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呂運亨은 1944년 8월에 조동우趙東祐 등과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는데, 뒤에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이만규李萬珪, 이상백李相佰 등이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하고 상당수의 조직원을 갖고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참패와 원폭투하로 패전이 임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이 통치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총독부는 당시 조선의 청년·학생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여운형에게 이를 다시 요청한다.
8월 15일 아침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蕂柳作)으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위촉받은 여운형은 17일에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완료하고 8월 26일에는 건국선언과 강령을 발표한다. 그러나 내부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차이에 따라 이합집산이 거듭되면서 세력들은 점차 분열하여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점차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된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포고 이후 네 방면으로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중 제1극동방면군 예하 소련 제 25군이 한국 점령임무를 담당했다,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상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웅기, 나진, 청진 등 주요 항구 점령을 목표로 싸웠으니 일본군이 항복하던 8월 15일 청진에서 전투중이었고, 일본 항복 이후 16일에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22일 함흥에 진주하였고, 20일 원산에 상륙한 부대는 둘로 나뉘에 2개 연대는 평양으로, 1개 연대는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24일 공수부대가 평양에 들어갔고 25일 해주에 도착한 병력 중 일부가 사리원을 거쳐 개성까지 진출한다. 각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와 군대해산, 군사시설 해체임무를 수행했으며 소련군 사령부는 8월 27일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운행을 중지시키고 38선 인접지역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북교류를 통제했다.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는 29일 치스차코프에게 연합국 합의인 38도선을 따라 병력배치를 명령했고 25군 휘하 88군단은 9월 3일, 10군단은 9월 10~12일 사이에 38선에 도착한다.
한편 미 태평양육군사령부의 대일 점령계획인 블랙리스트(Blacklist)최종판에 따르면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미 24군단을 포함한 미 제 10군이 한반도 점령군으로 배치되었다. 이 중 한반도 배치계획은 베이커-40(Baker-Forty)로 지칭되었으나, 8월 12일 미 24군단의 독자적인 한반도 점령이 결정되면서 하지 중장(John R. Hodge)이 이끄는 미 24군단은 9월 6일 제물포를 통해 한반도에 진주했다. 이어 베이커-40계획에 의거 9월 8일 제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과 서울 일대를 점령하고 9월 11일 소련군과 개성에서 조우한다.
9월 초 미군의 진주가 임박하자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9월 6일 여운형을 임시 의장으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조직법을 가결,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주석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은 참여를 거부하고 아놀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과 하지(John R. Hodge) 미군사령관은 10월 10일과 1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해방직후 독립국가 건설은 좌절되게 된다.
한편 이 시기까지 연합국이 합의 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것과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 뿐 이었고, 이 내용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외상이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위해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참여하에 미소영중 4개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협정을 미, 소가 체결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임정세력은 1946년 1월 4일 김구 주석의 성명을 통해 비상대책을 천명하고 1월 21부터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고 우익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이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가세하고 2월 1일과 2일 서울 천주교회에서 모든 우익정당, 사회단체와 중도파 정당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 비상국민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28명이 참여한다.
1946년 1월 9일 조선공산당등 좌익진영 29개 단체가 서울 YMCA강당에 모여 민주주의 민족전선 발기준비위원회를 개최, 일체의 준비공작을 공산당과 인민당에 일임하고 2월 15일과 16일에 좌익의 통일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를 개최한다. 좌익세력은 1946년 1월 2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돌연 찬탁 입장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인 박헌영은 평양에 송환되어 소련 측으로부터 신탁지지 지령을 받고 서울에 귀환, 찬탁 노선을 결정하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3월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47년 7월까지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하게 되고 47년 7월 19일 좌익세력의 여운형은 우익세력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발어지기도 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하게 되자 9월 17일 미국무장관 마샬(George C. Marshall)은 한국문제를 UN에서 안건으로 제출하여 11월 14일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을 43:0(기권5)으로 가결하였고, 18일~19일 북에서는 북조선 인민회의가 열려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8년 1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일행이 한국에 입국하고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소련은 1월 22일 유엔 소련대표를 통해 협조거부의사를 밝힌다, 김구는 1월 28일 위원단과의 면담 이후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지만 북측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월 26일 열린 UN소총회에서 미국이 제출한 남한총선거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하고 3월 1일 주한미육군사령관 하지는 5월 10일 총선거를 발표한다. 한편, UN소총회의, 결정에 실망한 김구 등은 3월 11일 김구,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조소앙趙素昻, 조성환曺成煥, 조완구曺琬九, 홍명희洪命憙 의 7거두성명을 발표, 남의 총선거와 북의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을 강경히 반대한다.
3월 25일 평양방송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원회가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 것을 결의한 내용을 보도하고 3월 27일 김규식에게 서한이 전달된다. 이에 김 구등은 19일에서 21에 걸쳐 북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김구, 김규식은 5월 6일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지만 이미 5월 10일 결정된 남한 단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편, 꾸준히 남한단선을 주장했던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파세력은 선거에 대비한 조직적 준비를 진행시켰고, 단선정부 수용을 반대했던 김규식 및 김구가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5월 10일 추정 등록률 79.7%, 등록자대비 투표율71.6%로 198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6월 25일 선거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5월 31일 국회가 개원되어 제헌작업에 착수, 7월 17일 헌법을 공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 선포된다. 이미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통과시킨 북한은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명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을 선언한다.
1948년 12월 12일 UN총회는 대한민국의 법적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정통성과 국제적 지지를 부여하는 미국측 결의안을 채택한다.
UN결의안 중 2조는 다음과 같다.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하였으며 또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지역에 대해 실효적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가 수립되었다는것과, 동 정부는 한국의 동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자 임시위원단에 의해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또한 동 정부가 한국내의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
한국사-52 "대한민국의 성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2006년.
Posted by es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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