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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윤봉길 의사와 홍구공원 의거 by estea

윤봉길 의사와 홍구공원 의거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떄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 도폐渡弊 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凋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盛衰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을 삼는다. 물론 1~2명의 상급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리는 없다. 따라서 금회今回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은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覺醒을 촉구促求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들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此際에 <조선>이라고 하는 관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은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결코 도이徒爾가 반드시 아님을 믿는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헌병대 조사 중에서.

일본군은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으로 상해를 점령하고 이 해의 천장절天長節(천왕탄생경축일; 4월 29일)행사를 상해점령전승기념식을 겸해서 외국인 공동조계인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하며, 경축식과 동시에 관병식이 있으니 일본거류민들은 일장기와 수통을 들고 참석하라는 보도를 상해에서 발행하는 일본신문에 게재하였다.
당시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위치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일본군의 위협과 만보산 사건으로 조성된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의 타결을 위해 김구를 대장으로 하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이름을 "한인애국단"이라 정하고 이미 이봉창의 의거를 시도한 바가 있었고, 상해 주둔 일본군총사령부가 한곳에 모이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관병식이 마무리 되고 11시 40분경 개회사와 축사 이후에 기미가요 제창때에 투척된 수통형 폭탄은 시라카와 이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앞 단상에서 폭발했다.
이 의거로 인해 상해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이시노리 대장은 중상을 입고 입원 후 사망,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중상을 입는다. 일본해군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은 우측 실명 등 중상을, 주중국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는 우측 다리 절단 등 중상을, 상해 거류민단장은 사망. 상해 총영사도 중상을 입는다.
의거 직후 체포된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일본 상해파견군 군법재판에서 사형 언도 후 11월 18일 오사카 형무소 이감, 12월 18일 카나자와(金澤) 육군 교도소 이감,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에 카나자와 교외 미고우시(三小牛)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된다. 당시 나이 25세였다.
이 거사로 인해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한국인과 중국인간의 연대를 회복시킬 수 있었고, 중국영토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여건을 조성했다.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이후 약화된 임시정부의 위상과 당시 국내외에서 침체되어있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1) 만보산 사건 : 만주 길림성 만보산萬寶山 삼성보三成堡에서 수전 개간중이던 한국소작민들의 수로공사에 주변 농지가 피해를 입자 인근 중국인들이 1931년 7월 1일~2일에 공사장에 난입하여 수로공사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관동군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을 증파해서 수로공사를 강행하는 한편 한국 국내신문 장춘지국에 근무하는 중국인 장소봉張小峰에게 중국인들의 습격을 받아 만보산에서 한국인들이 다수 살해되었다는 허위보도를 내게 했고, 이에 격양된 한국인들은 7월 3일부터 9일까지 인천, 서울, 신의주, 평양 등지에서 중국인 109명을 살해하고 160명을 부상케 했다. 이 사건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6000여명의 화교들이 중국으로 귀국했고 만주에서는 이에대한 보복으로 한국인들을 습격하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만보산 사건 이후로 만주와 관내 등 중국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주2) 만주사변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만주 봉천 북쪽 교외의 류조구柳條溝 부근의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취급 만주를 침략하여 4개월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노선을 점령한다. 이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수립하고 전 청나라 황제 부의簿儀를 집정으로 취임시킨다.

주3)상해사변 : 1932년 1월 18일 일본군은 중국인 불량배를 매수하여 일본승려와 신자 2명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한명이 1월 24일 사망하자, 1월 27일에 24시간의 시한부로 상해시장의 사과, 가해자의 처벌, 피해자의 배상, 배일운동의 단속을 요구한다. 중국측이 28일 오후 3시 일본측의 요구에 대한 수락의 뜻을 통보하지만 일본은 1월 28일 밤 11시 10분경 군사작전을 개시한다. 중국측에서는 채연해蔡延楷가 지휘하는 제19로군이 시가전을 벌이면서 방어하였고 1월 29일 국민당정부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과 동시에 장개석 예하의 장치중張治中이 지휘하는 제5로군(제87사단과 제88사단)을 상해에 투입하고 일부 민병대도 방어전에 참가한다. 일본군은 중국군과 맞서 본국에서 해군과 육군을 증파하여 병력 10만과 항공기 100여대를 투입하여 상해를 점령하게 된다.

참고자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논문집. 한국 근현대사학회 편. 국가보훈처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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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9 05:11 2006/11/1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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